발터 울브리히트
발터 에른스트 파울 울브리히트
Walter Ernst Paul Ulbrich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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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의 울브리히트 | |
동독의 국가평의회 주석 | |
임기 | 1960년 9월 12일 – 1973년 8월 1일 |
전임 | 요하네스 디크만 (권한대행) |
후임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권한대행) |
총리 | 오토 그로테볼 빌리 슈토프 |
동독의 국가방위평의회 주석 | |
임기 | 1960년 2월 10일 – 1971년 5월 3일 |
전임 | (신설) |
후임 | 에리히 호네커 |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중앙위원회 제1서기 | |
임기 | 1950년 7월 25일 – 1971년 5월 3일 |
전임 | 빌헬름 피크, 오토 그로테볼 (공동의장 직함) |
후임 | 에리히 호네커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93년 6월 30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작센 왕국 라이프치히 |
사망일 | 1973년 8월 1일 | (80세)
사망지 | 동독 템플린 |
정당 |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독일 공산당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
배우자 | 마르타 슐멜린스키 로테 퀸 |
발터 에른스트 파울 울브리히트(독일어: Walter Ernst Paul Ulbricht, 1893년 6월 30일 ~ 1973년 8월 1일)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독일 공산당의 창당과 독일 민주공화국(동독)의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0년부터 1971년까지는 독일 민주공화국의 지도자로 일했다.
1912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한 것이 그의 첫번째 정치 활동 이력으로 사회민주당에서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학습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제국에 의해 징집되었으나 그는 전선에서 집단 탈영을 조직하고 독일 11월 혁명에 참가했으며, 독일 사회민주당을 탈퇴하고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에 가입하였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올라오면서, 그는 독일의 정당에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키는 앞잡이로 알려졌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동독에서 독일 공산당을 재조직했으며, 독일 사회민주당을 병합해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을 설립하고 최종적으로는 동독의 지도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
[편집]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울브리히트는 8살 밖에 안되어 학교를 떠나 가구 제작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에 1915년 육군에 입대하여 발칸반도와 동부 전선에서 둘다 복무하였으나 전쟁 말기에 탈영하여 독일 11월 혁명에 참가하였다.
1920년 독일 공산당의 당원이 되어 빠르게 그 진급들을 통하여 올랐다. 그는 소련에서 완벽한 레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데 외국인 학생들을 가르친 모스크바에 있는 비밀 학교 국제레닌학교에 수학하였다. 1928년 귀국 후에 독일 의회에 선출되었다. 그 당시는 공산당과 나치당 사이의 맹렬한 충돌이 일어난 때였다.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으로서 권력에 오르면서 야당들은 곧 수권법에 의하여 추방되었고, 독일 전국의 공산당원들은 달아나거나 은둔을 하였다. 그들 중의 하나였던 울브리히트는 처음에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로, 그러고나서 내란이 일어난 스페인으로 달아나 국제 여단에서 공화주의자들의 편을 들었다.
1937년 모스크바로 돌아가 활동적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재판과 숙청을 성원하였다. 울브리히트는 스탈린의 상관들이 숙청당한 것을 보면서 자신을 독일 공산당의 더욱 나가서 진급으로 올라가는 데 허용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에 그는 독일군 포로들이 공산주의로 개종하는 데 그들을 놓아주었다.
동독의 지도자
[편집]독일 공산당의 후신인 통일사회당 당원이 되어 1949년 10월 11일 독일 민주 공화국이 설립되자 부수상이 되었다. 1960년 대통령 빌헬름 피크가 사망하자 대통령제가 폐지되었고, 그 대신 주 의회가 설립되었다. 그는 서기장 겸 주석이 되어 나라의 권력을 잡기 시작하였다.
6월 17일 봉기
[편집]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한 날에 울브리히트는 독일로 귀국하여 5년 안에 새롭게 형성된 독일 민주 공화국의 국가 원수인 서기장이 되는 데 자신을 연습시켰다.
헝가리의 라코시 마차시에 의하여 즐겨진 권력과는 달리 울브리히트의 직위는 스탈린이 살아있는 동안에 안정되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고 4달 안에 라코시는 권력에서 물러났다. 울브리히트는 그해 6월 동독의 근로자들이 파업으로 들어갈 때 자신의 첫 실제 시험을 향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도움과 함께 울브리히트는 동독의 폭동을 억누르고 생존하였다.
1955년 울브리히트는 동독을 바르샤바 조약 기구로 가입시켰다.
베를린 장벽
[편집]1960년대 초반으로 봐서 동서 베를린 사이의 차이가 생기자 동베를린으로부터 서베를린으로, 그러고나서 서독으로 대이동은 자본주의를 위한 거대한 광고였고, 공산주의, 울브리히트와 새로운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에게는 동등하게 부족하였다. 그러나 흐름을 막는 데 베를린에서 장벽을 위한 제안들은 모스크바에 의하여 견고하게 거부되었고, 동베를린 시민들의 마음들을 이겨야 했다. 그러나 1961년 거의 3백만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가 노동의 부족과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위한 날카로운 당황을 일으켰다.
6월 15일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2달 전에 울브리히트는 기자 회견에서 "우리 수도의 건축가들은 주택 건설에 완전히 고용되었고 그 노동력은 그 일을 위하여 전개되었다"고 말하면서 "아무도 장벽을 건설하는 데 아무 의지를 가지지 않다"라는 명언과 함께 끝냈다. 8월 12일 ~ 13일의 밤에 유자 철선의 담이 세워졌다. 더 올라가면서 많은 동독인들은 높은 긴장의 장면들에 자유를 위한 마지막 분의 돌진을 이루었다. 며칠 후에 콘크리트 장벽이 완료적으로 서베를린의 103 마일 페리미터를 애워쌌다. 냉전의 상징으로 알려진 이 장벽은 28년 동안 남아있었다.
정계 은퇴
[편집]1960년대 후반은 소련과 서독, 그리고 그들의 각각 지도자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빌리 브란트 사이의 관계에 온화한 향상을 보았다. 그러나 울브리히트는 반서독주의에 남아있었고, 소련의 정치국은 그를 물러나는 생각을 하였다.
1971년 5월 3일 울브리히트는 건강 악화로 사임하였고, 에리히 호네커가 그의 뒤를 이었다.
1973년 8월 1일 동베를린 북부 템플린 근처에서 사망하였다.
같이 보기
[편집]외부 링크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발터 울브리히트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사회주의통일당 공동의장) 빌헬름 피크 오토 그로테볼 |
제1대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50년 7월 25일 – 1971년 5월 3일 |
후임 에리히 호네커 |
전임 신설 |
제1대 독일민주공화국 국가방위평의회 주석 1960년 2월 10일 – 1971년 5월 3일 |
후임 에리히 호네커 |
(권한대행) 요하네스 디크만 |
제1대 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주석 1960년 9월 12일 – 1973년 8월 1일 |
(권한대행)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